"선생님, 제가 가식적으로 보이나요?”
필자와 상담하는 어느 대학생이 상담 시간에 불쑥 던진 질문이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지?”
“어제 동아리 선배가 저 보고 그래요. 제가 가식적이라고…맘에 안 든다는 식으로요.”
이 학생은 필자와 상담하면서 평소에 주변 사람들 눈치를 많이 보고 자기 의사 표현을 자신 있게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었다. 다른 사람에게 폐라도 끼칠까 봐 늘 염려하며 조심스럽고
자기 스스로를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이 학생의 주된 어려움이었다.
아마도 선배가 던진 ‘가식적’이라는 한마디가 이 학생의 마음에 크게 걸렸던 것 같다.
“그 선배가 너의 어떤 모습을 두고 가식적이라고 하든?” “제가 너무 착한 척한데요.
저번에 동아리 엠티 가던 날 그 선배하고 저랑 후배 하나랑 셋이 아침 일찍 선발대로 가기로 했는데,
저 빼고 모두 다 늦은 거예요. 선배는 30분쯤 지나서 오고, 후배는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일찍 못
온다고 미안하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선배하고 저랑 가는데, 짐이 무겁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후배니까 더 많이 들었죠. 셋이 질 걸 둘이 지다보니 무거워서 고생했어요.
근데, 나중에 그 후배가 늦게 엠티 장소로 왔는데 저랑 선배를 보고 미안하다고 했어요.
저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 선배가 마구 뭐라 그러면서 후배를 혼냈거든요. 그때 제가 말렸어요.
엠티 첫날이고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닌데 그만하시라고요.
그때는 그냥 그렇게 지나갔는데, 어제 그 얘기하면서 제가 그렇게 한 게 가식적이라고 그래요.”
“그럼, 약속에 늦은 후배에게 ‘괜찮다.’고 했고, 후배를 야단치는 선배한테 그러지 말고 참으라고
한 것에 대해 가식적이라고 한 거네?” “그런 거죠.” “그 똑같은 사실에 가식적이라는 말 대신
‘너그러운’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있을까?” “사실 저는 너그럽게 한다고 한 거 거든요?
제 입장에서는 그렇지만, 근데 그게 가식적인 거 아닌가요? 기분 나쁜 걸 아닌 척했으니까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럼 ‘가식적’이라는 말이나 ‘너그러운’이라는 말 대신,
있는 그대로 약속에 늦은 후배에게‘괜찮다.’고 말했고 야단치는 선배한테 ‘그러지 말고 참으라.’
고 했다면 어떻겠어? 그게 있는 사실이잖아?” “네, 그러네요. 그냥 있었던 대로만 하면 되겠네요.”
이런 대화가 오가면서 그 학생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한다. 인간은 어떤 경험에 대해
무엇이라고 개념을 붙이는 능력이 있다. 세상에 대해 정보를 파악하고 처리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떤 말로 개념화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면이 있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 중에는 판단하고 평가하는 개념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판단이나 평가적인 표현들이 실제 사실이나 경험을 왜곡하기도 하고 그런 평가적인
말의 속성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대상으로 규정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평가적 개념들은 모두 보는 사람의 욕구나 가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같은 사실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과 바람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이 학생의 경우도 똑같은 행동에 ‘가식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너그럽다.’고 할 수도 있다.
소통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묘사하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말을 사용했다면 오늘부터라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경험한 것
자체를 묘사해 보자. 이런 습관의 변화가 우리가 사물을 좀 더 수용적이고 지혜롭게 바라보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소통을 할때도 불필요한 왜곡이나 모호함을 크게 줄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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