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함께 볏가리를 세우고 돌아온 형은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 많은 식구를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지, 턱없이 부족한 볏단 생각에 이리저리 뒤척인다. 이미 모자란 것에 이골이 나 그런대로 견뎌나갈 것 같은데 새로 살림을 차린 동생네가 마음에 걸린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동생도 마찬가지, 허전한 가슴에 정신이 말짱해진다. 살림살이가 적어도 상관없는 자신이지만, 식구가 많은 형님네가 자꾸 걱정이 된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들로 나간다.“형님 볏가리가 더 높아야지.”
“아우네 볏단이 더 많아야 돼.”서로 자기 것에서 저쪽으로 옮겨 나르느라 밤 깊어가는 줄 몰랐다. 늘지도 줄지도 않는 이유를 찾을 겨를도 없이 비지땀으로 형과 아우의 온몸이 젖어들었다. 달빛이 견디다 못해 끼어들었다. “아니??”“형님!”“아우야!”서로 알아보고 부둥켜 안은 형제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누구나 알고 있는“의 좋은 형제”이야기이다. 반복해서 들어도 진부하지 않다. 형제의 뜨거운 정에 코끝이 찡해지고, 내가 형님을, 동생을 안은 것처럼 감격이 차오른다.
서늘한 밤바람에 끌려 거실에 이부자리를 폈다. 아이들이 야영하는 기분이라며 따라 나왔다. 가을 밤 하늘이 거실 창으로 한 눈에 들어왔다. 달빛이 너무 맑아 울었다는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젖혀진 창문을 조금씩만 열어 놓으려 서성이는 사이 애들이 잠에 떨어졌다. 그 옆에 누웠다. 달을 보다가 애들 얼굴에 비친 달빛에 나도 울고 싶어졌다. 그윽하고 부드럽게 내려앉은 달빛에 아이들은 천사가 돼 있었다. 깊숙이 들어온 달빛은 거실을 천국의 한 방으로 만들었다. 보잘것없는 물건들이 화려하게 빛났고 자질구레한 사물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애들을 감싸 안은 달빛, 그것은 신의 미소였다. 가만히 끌어안는 사랑의 빛이었다. 보살핌과 가호의 손길이었다. 아이들 얼굴에서 하나님의 웃음이 보였다. 만족과 평화와 자애의 미소였다.
사과가 탐스럽다. 누런 배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황금 빛 들판, 고개 숙인 수수, 파란 하늘, 이 풍요의 가을에 서면 절망감이 든다. 사람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신의 작품, 하나님의 결실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비할 수 없이 보잘것없는 내 자신에 중심이 무너진다. 흔들리는 계절, 겸허할 수밖에 없는 계절이다. 이상한 것은 절망해 가는 만큼 속이 시원해지고 편해진다는 것이다. 그 신께 귀의하려는 인간의 본능 때문인가. 내가 작아지니까 남이 커지는 것이다. 남이 귀해지고 소중해진다.
나를 끌어 올려 받아 주는 하나님이 더 위대해진다. 그분의 결실과 만족이 내 것 인 양 뿌듯해진다. 그 감동이 둥그렇게 커지더니 가을 밤 하늘에 두둥실 떠오른다. 한가위 달에서 내가 느끼는 하나님의 은혜다. 나를 격상시키는 빛이다.
이 계절에 월광욕을 하다 보면 그 맑은 빛이 구차한 나를 고상하게 하는 안위에 젖는다. 내가“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베드로전서 2장 9절)임이 확인되는 은총의 빛을 겪는다.보름날 한가위에 내가 커지고 넓어지고, 남은 더 커지고 귀해지는 희망의 빛을 본다. 한가위 달빛은, 나를 좋아한다는 하나님의 활짝 핀 웃음이다. 사랑받은 내가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큰 희망의 빛이다. 서로가 얼마나 귀한지 확인하는 아름다운 빛이다. 고마움에 젖은 눈시울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광채다. 이 한가위 달빛에 나도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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