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는 16세기 영국의 인문주의자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문주의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인간의 양심과 정의를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당시 영국의 국왕이던 헨리 8세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왕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서 모어는 정의를 위해 왕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1634년에 반역죄로 저 유명한 런턴타워에 갇혔다가 그 이듬해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토머스 모어, 정치적 이상향을 그린 <유토피아>라는 작품으로 더 잘 알려진 그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위해 양심을 지킨 정치가였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가 그린 유토피아는 오늘 우리 사회가 꿈꾸는 정치와 경제가 바로 선 세상 바로 그것이었다(<새벽이슬(이국헌 저, 생각나눔, 2010)> 참조).
정의 실현의 이상과 현실
토머스 모어의 시대는 왕정 시대였다. 캄파넬라가 <태양의 나라>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정의로운 태양 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왕정 시대에 정의로운 사회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성을 일깨운 인류는 오래지 않아 왕과 귀족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이 아니라 시민들의 대표인 의회가 다스리는 나라인 공화국을 건립하였다.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혁명은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와 미국을 세워 비로소 인류가 자유와 평등의 깃발 아래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공화 정치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 어디에서도 정의로운 나라를 찾기는 어렵다.위대한 혁명을 통해 일찍이 시민의 권력을 세운 프랑스가 그렇고,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썼던 미국이 그럴진대, 우리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이민족의 압제와 동족 간의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키고,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우리를 일컬어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 말한다.
1960년대에 아프리카 수단과 우리나라의 경제적 수준은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40년 후 그 두 나라는 더 이상 비교가 될 수 없는 국가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 섀무얼 헌팅턴은 한국의 문화가 이러한 차이를 낳았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연구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놀라운 변화를 극찬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기적처럼 전 세계 경제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기적과도 같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대가가 요구되고 있고, 그로 인한 정치적 희생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후불제 민주주의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민주화가 실현되기는 했지만 그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치러야 할 희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정치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정치가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토머스 모어와 같이 정의를 위해서 양심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든 이유도 바로 이런 잘못된 정치 문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허와 실
경제는 어떠한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최빈국의 지위에 있던 우리나라는 불과 40년 만에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국가 경제 발전이 곧 국민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 규모는 천문학적으로 증가하지만 실업률은 감소되지 않고 있다. 경제발전으로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파레토의 법칙에 따르면 20퍼센트만이 경제 발전에 따른 수혜를 얻고, 나머지 80퍼센트는 그 수혜를 체감할 수 없다. 국가 경제가 발전할수록 양극화만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을까? 그것은 오늘날 경제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자유주의 원칙에 입각한 경쟁 원리를 앞세운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신자유주의는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세계적 갈등의 주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레드오션의 시스템에서는 아무리 경제가 발전한다 할지라도 경제적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해마다 경제적 규모가 천문학적으로 증가해도 국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정의롭지 못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정이 이러니 어떻게 경제적 정의를 기대할 수 있으며, 희망의 사회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의 교훈이 말해 주듯이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이상 사회를 추구하고 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이러한 의지에 힘입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구체적인 시민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정의인지를 스스로 정립하고, 그 정립된 정신 철학에 따라서 의식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존 스튜어트 밀이 강조했던 것처럼 공리주의가 참된 정의라고 생각하곤 한다.그러나 하버드 대학 교수 존 롤스의 영향 아래서 마이클 샌델은 공리주의를 넘어선 공동체주의의 이상 속에서 참된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공동체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가 이익 사회(게젤샤프트)가 아닌 공동 사회(게마인샤프트)이며, 모든 결정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념이다. 사회(society)와는 달리 공동체(community)는 사랑과 연대로 이어진 집단이다. 가족이나 신앙 집단이 하나의 공동체이듯이 우리 사회는 인류 공동체이다.
따라서 다수의 이익이라는 계산적 기준이 아닌 동일한 의식과 사랑의 연대가 판단기준으로 작동하는 사회가 바로 공동체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정의는 공동체적 정의, 즉 사랑과 돌봄과 나눔이 실현되는 정의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정의가 실현되어야만 정치와 경제가 바로 선 세상을 만들 수 있다.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은 이성적이지만 그 이성이 언제나 합리적 이성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합리적이기보다는 도구적이다.따라서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공동체적 정의를 실현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이성을 합리적으로 제어해 줄 외부적인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순수 이성을 초월한 힘이다. 우리는 그 힘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이 합리적으로 작동하도록 돕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공동체의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구현한다면 그때에 비로소 정치와 경제가 바로 선 세상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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