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남이 당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목격하면서 우리는 억울해서 느끼는 분노, 즉 울분을 느낀다. 억울한 일이란 그래야 할 정당한 근거도 없이, 그래야 할 당연한 이유도 없이 부당한 피해를 받는 것을 말한다. 무고한 자가 유죄 선고를 받거나 죄질에 합당한 처벌이 아닐 때 우리는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범죄자가 이유 없이 무죄를 선고받거나 중죄인이 부당하게 감형을 받을 때 우리는 울분을 참지 못한다. 한편 우리는 자기가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응분의 몫을 누리지 못할 때 억울하다고 생 각한다. 또한 불로 소득자가 자신의 몫 이상을 향유하거나 호사를 과시할 때 울분이 치밀게 된다.
울분의 근거
인생을 100미터 경주에 비유해 보기로 하자. 달리는 능력도 타고났고 또한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도, 능력이나 노력 어디를 봐도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뒤지고 말았다면 그보다도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억울하다는 것은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실력이나 노력 어디를 봐도 나보다 못한 자에게 지고 말았다면 그에 대해서는 불평과 불만을 토로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 셈이며, 그런 의미에서 억울한 일이고 울분이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다.100미터의 인생 경주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동일 선상에서 능력과 힘을 겨루는 것이라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해서 정당하게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경주에서는 모두가 원점에서 동시에 출발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어떤 자는 유족한 중류 가정에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아 이미 50미터 전방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재벌 2세로 태어나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엄청난 상속으로 95미터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한다면, 적수공권으로 원점에서 출발하는 많은 사람의 울분은 이유 있는 정당한 울분이 아닐 수 없다.
제한과 조정의 정의
좋은 부모를 갖거나 갖지 못하거나 하는 일, 상속을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하는 것, 어떤 사회적 지위에 태어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일, 심지어 천부적 자질을 타고나거나 타고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 이 모든 변수는 인생의 경주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요인들임에도 그것을 내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내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연적 사실로 주어진 것, 그런 뜻에서 운명적인 것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우리가 이성적 존재로서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방임하는‘정글의 법칙’에 만족할 수 없다면, 그래서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것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저 우연적이고 운명적인 요인들을 인간적으로 제한,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란 바로 이와 같은 제한과 조정의 장치가 확립된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보상과 균형의 미학
현실의 부정의를 극복하는 방도에는 몇 가지 모형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현세의 부정의가 내세의 보상 체계에 의해 균형을 회복하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세가 분명히 존재해야 하고 그 내세에서 정당한 보상을 집행할 자로서 신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보상 체계는 내세와 신의 존재를 담보로 해야만 설득력이 있으며 그러지 못할 경우이는 현세에서 억울한 자들에 대한 한갓 심리적인 보상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나아가서 이는 현실의 부정의에 눈감고 그것을 정당화해 줄 어용의 논거로도 오용될 수 있으며 현실 개혁의 의지가 나약하거나 현실 개혁에 실패한 자들의 도피처가 될 수 있을 뿐이다.그런데 이상과 같이 내세에 대한 확고한 신념조차 없었던 우리 선조들은 이승의 비리가 내세에 의해 보상된다는 기대마저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낫다.’라는 강한 현세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의 부조리를 개혁할 강한 의지도 없고 내세에 의해 보상되는 길마저 막혀 있을 때 가능한 제3의 길은 소위 ‘전설의 고향’식의 보상체계이다. 이승에서 억울하게 죽은 한 맺힌 자들은 원귀가 되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다가 음습한 야밤에 이승에 출몰하여 보복적 정의를 구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상상적인 보상일 뿐 현실에 맺힌 응어리는 그대로 남는 까닭에 거기에 한(恨)의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현실 변혁
오늘날에는 내세를 담보로 해서 현실의 억울함을 그대로 감수하거나 원귀가 되어 복수할 그날을 기다리며 이승의 한을 그대로 감내한다는 생각은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이다. 그 대신 현실의 부정의와 비리를 현세에서 보상해 줄 현실 변혁의 방법에 기대를 걸게 된다. 그것은 불확실한 내세나 원귀의 보복에 소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서 일도양단 간에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급진적 혁명론자이건 점진적 개혁론자이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현실의 부정의와 비리는 오직 현실 속에서만 보상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현실에 걸려 넘어진 자는 오직 현실을 딛고서만이 일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문제의 해결 노력을 내세로 미루고 무마시키는 것은 현실 호도이자 일종의 기만일 수 있다. 낙원을 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현세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민의 힘
결국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현실 개혁의 주체는 시민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 이상 통치자의 선의지에만 기대하지 않으며 비록 정의의 최종적 구현자가 통치자일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는 시민적 합의와 압력에 의해 강제될 수 있을 뿐이다.우리 사회에 사회 정의가 구축, 수호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개인, 즉 의인들의 희생이 요구된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명만 있었어도 그렇게 비참하게 파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우리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여 조직적인 부정의를 탐하는 자들에 의해 농락당하고 만다. 따라서 의인들이 사회의 유력한 파수꾼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힘이 조직되어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구적 지도층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의 확산만이 사회 통제 및 사회 정화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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