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제자 작은 그릇에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여울이 퍼질 듯한 쪽빛 하늘을 보다가 멀리서 우리나라의 하늘을 그리는 네게 몇 자를 보낸다.일전의 네 편지로는 두마게테의 하늘이 유리알처럼 깨질 듯하다더니 네가 싸가지고 간 우리나라의 하늘이 필리핀에서도 자리를 잡았나 보구나.하늘은 그리도 넉넉해 네게 싸주고도 남아 저토록 높고 푸르기만 하다. 낯선 오지의 섬에서 벌써 고모가 생기고, 삼촌도 만들고 심지어 아들까지 둔 대부가 되었다니 네 별명‘작은 그릇’은 역시‘큰 그릇’으로 손색이 없구나.너는 청춘의 뿌리를 땅에 내리기로 마음먹고 귀농하자 했으니 낯선 땅의 사탕수수 밭에서 흘리는 땀방울조차 아까워하지 않으리라. 말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열려진 마음 바탕에 사랑까지 얹어 있으면 그 무언들 받아들이지 못하겠니. 그리고 척박한 땅에 우리나라 딸기까지 들고 가서 그들에게 맛의 재미를 나눠 준다니 네 소박한 꿈에는 사람을 향한 사랑을 늘 엿볼 수 있었다.
네 사랑을 새기려니 얼마 전 내가 겪었던 일이 떠오르는구나.
나는 근처 종합병원 안에 있는 은행으로 공과금을 내러가곤 한단다. 그날도 공과금 용지에 계좌번호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앉았던 아주머니가 애가 끊어지게 울기 시작하더라. 큰소리도 아니고 안으로 우걱우걱 삼키면서 단장이 될 듯한 울음이라 나는 쓰던 일을 멈추고 애간장이 녹아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단다. 누군지 쳐다볼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구나.그런데 저쪽 복도에서 대여섯 살 작은 꼬마 둘이 쪼르르 달려오는 거야. “엄마, 왜 울어? 울지 마.”우는 엄마를 달래는 꼬마를 부둥켜 안자 그 아주머니는 더 소리를 높여 흐느끼더구나. 그제야 나는 아주머니를 쳐다볼 수 있었지. 이제 갓 마흔이 될 듯한 젊은 아낙으로 옆에는 한 청년이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거야. 철모르는 어린애들은 다시 엄마 곁을 떠나 달려오던 복도로 까르르대며 뛰어가고.나는 창구에서 공과금을 내고 돌아서 올까 하다가 아주머니의 애끊는 소리에 끌려 그들에게 다가갔지. 은행 창구 옆의 인공신장수술실을 쳐다보다 “매형이 지금 막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꼬리를 흐리는 청년의 말에 나는 아주머니 곁에 앉고 말았단다.
그 일이 어느 누군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다가올 일이지만 닥치는 순간만큼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지 않을까. 하늘 같은 남편을 잃고 깜깜할 젊은 미망의 슬픔이 옮겨져 와 나도 모르게 아주머니의 어깨를 감싸고 같이 울어버렸단다. 나도 애가 끊어지듯 하더구나. 낯선 아낙이 곁에 와서 부둥켜 울고 있으니 그 젊은 미망인은 울음을 그치고 나를 처연히 쳐다보더라. 젊은 아낙의 안경 너머 범벅이 된 눈물 사이로 고마움이 보였단다.“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한숨을 푹 내쉬면서 작은 소리로 답을 하던 아주머니의 어깨를 토닥여 주면서 나는 일어났지.“누구에게나 다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저 힘을 내야지요. 이 말밖에 할 수 없네요.”서로 잡은 손은 이미 낯선 사람들의 그것이 아니었다.그렇구나, 같이 울어 주는 일은 무너질듯한 슬픔도 덜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병원을 나오니 쏟아지는 햇살이 그토록 시리던지.잠깐 울었는데도 그새 눈두덩이 부어 땅만 보고 걷다가 잠시 얼굴을 드는데 웬 아가씨의 머리띠가 햇살처럼 명랑하게 반짝이더라. 구슬피 울던 아낙의 흐느낌이 뒤를 따라오던 차, 명랑한 반짝임에 이끌려 아가씨 곁으로 다가갔지. 도로 위에 굽 낮은 구두와 티셔츠, 치마들을 펼쳐놓고 파는 데 구두도 치마도 어찌 그리도 곱던지. 처연한 슬픔 끝에 다가오는 아름다움이라 더 이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보답으로 뭐라도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이 생겨 구경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지. 주차단속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물건을 치우라고 호통을 치며 다가오는 거야. 아가씨는 도로 가에 주차시켜 둔 채 물건을 보도 위에 펼쳐놓고 팔았던 거지. 머리띠는 여전히 눈부시고 명랑한데 곱던 아가씨의 얼굴이 빨개져서 허둥대는 거야. 어쩌겠니. 나는 구경하던 일을 멈추고 같이 거들었지. 차에 모두 실어 나르니 차 뒷자리에도 채 차지 않을 정도의 물건이지만 아가씨의 하루살이가 걸린 일이 아니더냐.“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병원의 아낙처럼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하던 아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병원에서 있었던 일부터 나와서 걷다가 눈부신 머리띠가 이끌어 오게 되었다고 말하다 보니 어느새 그 아가씨와도 낯선 사이가 아니더구나.지금도 거리에서 노점을 하는 그 아가씨를 찾아간단다. 자전거 탈 때 신는 편한 신은 그녀가 구해다 주었단다.
작은 그릇아.
마치 큰 선행이라도 했듯이 자랑스레 벌여 놓았구나. 하지만 지난 하룻날의 일을 두고두고 새기는 것은 사람살이에 대한 깨우침을 일러 주기 때문이리라.나이가 들어가면서“노후자금은 얼마나 준비했어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듣는 거 같다. 솔직히 나는‘카르페 카르페 디엠, 인생을 즐겨라’에 몰두했기에 노후자금 마련은 소홀히 했단다. 그리고 모은 재산? 그것 역시 재테크를 강 건너 물보듯 물끄러미 넘기고 말았지. 이제와 후회하느냐고?후배들의 재테크를 견주어 볼 때 내가 너무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머쓱하기도 해. 하지만 사람 재산만큼은 내 노후의 대비책으로 든든하단다. 잘난 체하는 말로 들리기 쉽겠지만 말이다. 내 비록 모은 재산은 없어도 사람 사이에 나눌 수 있는 사랑을 가꾸니 가난한 부자라는 말이 자랑스럽다. 낯선 오지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네가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랑할 만큼 네 사랑도 뿌리내리지 않았더냐. 닮은 사람끼리 만나듯 우리는 사랑을 키우는 농부가 되자.가짜 명품이 판치는 세상에 진품인 참마음을 목걸이로 시계로 차고 옷으로 입으면 진실이 통하는 세계에선 누구에게나 낯선 사람으로 머물지 않게 되는 것이겠지.사랑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나누는 마음에 그치지 않고 움직씨가 되어야 하는 것이야. 움직이는 사랑은 슬픔을 덜어 내고 용기는 배로 부풀려 주는 것이란 말이지. 절망하는 이에게 돈 봉투 툭 던지는 것보다 참마음의 눈길을 주고 돌아보면 살 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들려주자.
여전히 쪽빛 하늘은 너그러움으로 사람의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사랑하라는 무언의 암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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