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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라우딩(Shrouding)과 탈편향의 저주(Curse of Debiasing)

by 은빛지붕 2023. 9. 26.

 

 

쉬라우딩이 뭐예요?
요즘 대학생들은 좀처럼 강의 교재를 구입하지 않는 것 같다. 교재를 사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면, 한 권에 몇 만 원씩 하는 교재를 학기마다 구입하자니 20~30만 원이 들어 금전적으로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휴대전화를 유심히 보면 대부분 고가의 최신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닌다. 학생 신분이면서 장래를 위한 책에 투자하지 않고, 당장의 즐거움을 위한 스마트폰에 투자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왜 몇 만 원짜리 대학 교재는 사지 않는 학생들이 출고가가 100만 원에 육박하는 스마트폰은 쉽게 구입하는 것일까? 구매 초기에 무료로 또는 싸게 스마트폰을 팔고, 기기 값을 비싼 요금제와 할부금으로 챙기다 보니 소비자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비자 기만(?) 전략을 쉬라우딩(Shrouding)이라고 부른다.
shroud는 ‘뒤덮다, 가리다’라는 뜻의 단어인데, 여기서는‘camouflage(위장하다)’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이라면 훈련에 나가 탱크나 텐트 등을 camouflage net(얼룩덜룩한 국방색 천 쪼가리가 붙은 그물)로 본품은 싸게, 부가품은 비싸게 대표적인 예로 프린터 시장이 있다. 프린터는 매우 싼 헐값에 팔고 잉크는 적정 가격의 5배 이상으로 비싸게 파는 것이 프린터 업체의 전략이다. 비싼 잉크 가격을 철저히 감출수록 프린터가 쉽게 팔리게 된다. 미국에서 프린터를 구매하는 소비자의 3퍼센트만이 장당 인쇄 비용(잉크값)을 알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프린터 회사는 홈페이지에 잉크값을 게시하지 않거나 게시하더라도 소비자들이 잘 찾아내지 못하게 숨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잉크를 두 개만 사도 벌써 프린터값을 훌쩍 넘는 경우가 많아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의미에서 ‘배꼽 마케팅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단 프린터뿐이 아니다. 호텔은 숙박비를 싸게 하는 대신에 룸서비스, 전화비 등의 부가 서비스를 매우 비싸게 책정한다고 한다. 금융 회사들은 수수료를 단번에 부과하기보다 매일 또는 매달에 걸쳐 조금씩 부과하는 방법을 택한다고 한다. 또한, 즉석 사진기는 싸게 필름은 비싸게, 전동 칫솔은 싸게 칫솔모는 비싸게, 게임기는 싸게 게임팩은 비싸게 파는 전략은 모두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쉬라우딩 전략이 잘 먹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바익스와 라입슨 박사(Gabaix and Laibson)(2006)는 소비자들이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myopic)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본품(Base good, 예를 들어 프린터)과 부가품(Add-on, 예를 들어 잉크)의 가격을 모두 고려하여 의사 결정을 내리겠지만 근시안적 소비자는 본품의 가격만을 참고한다는 것이다.

 

 

탈편향의 저주
그렇다면 선량한 기업이 나타나 소비자를 근시안적 편향에서 탈출시키는 일은 없을까? 즉, 양심 있는 프린터 회사가 등장하여‘당신들은 그동안 쉬라우딩 전략에 속아 왔습니다.’라고 소비자들을 바르게 교육할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프린터도 제값에 팔고 잉크도 제값에 파는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쉽지만 그런 착한 회사는 등장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 회사가 등장하여 어떤 소비자가 프린터와 잉크값의 진실을 알아 버린다면 똑똑해진 소비자는 프린터는 기존의 업체에서 싸게 구매하고 잉크만 착한(?) 회사에서 사거나 값싼 재생 잉크를 제3의 업체에서 구매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착한 회사는 프린터도 전혀 못 팔고 잉크도 제대로 팔 수 없게 되어 망할 것이다. 가바익스과 라입슨 박사는 우매한 소비자를 탈편향(Debiasing)시키려다가 우리 회사만 망하게 되는 저주(Curse)를 받게 된다는 의미에서 탈편향의 저주(Curse of Debiasing)라고 불렀다.
탈편향의 저주는 우리 스스로가 근시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우리를 돕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지금 당장의 가격과 이익뿐 아니라 미래에 발생할 비용과 효과까지 따져 보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의 기본이다. 우리가 가진 재물을 어떻게 소비하고,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멀리 내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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