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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울릉도 호박엿

by 은빛지붕 2024. 5. 20.


가여웠다.

여전한 뇌성마비 장애에다, 지붕에서 오징어를 널다가 그만 떨어져 저는 다리가 안쓰러웠다.

몸을 간신히 가누는 57세의 아주머니를 정성껏 간호했다. 여러 날 동안 찜질을 해주고 팩을

붙여 주었다.며칠 후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찾아왔다. “저 오, 오징어를 살…”말이 느리고 어눌했다.

순간 그간 치료를 도운 젊은이 머릿속이 턱 막혀왔다. ‘오징어라니, 난 오징어를 먹지 못하는데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할까?’그의 체질과 신념에서 나오는 알레르기 반응에 비닐봉지의 까만 분위기

방 전체를 어둡게 하고 있었다. “그-그런데 그-급히 사느라 구-구하지 못하고 호- 호박엿을 조-

조금 사왔어요.” “네?-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제- 제가 고맙지요, 저 다-다리 별로

안-아파요.” 그동안의 수고와 보람이 가슴을 타고 감동으로 내려왔다. 호박엿 맛이 그만이었다.

울릉도에 들렀을 때 이 이야기를 듣고 그 호박엿을 먹어보니 말 그대로 울릉도 호박엿이었다.

순수한 정감의 감칠맛,진실이 배어 있는 듯 달콤함이 혀끝을 지나 온몸으로 번졌다.

 

릉도는 그렇게 사람 맛이 나는 곳이었다. 해변에 널려 있는 둥글둥글한 돌덩이들에 부딪히는

파도커다란 힘을 안겨 준다. 어디를 가나 수도꼭지를 틀면 정갈한 물이 콸콸 쏟아진다.

아름드리 향나무가 파란 하늘을 찌른다. 폐 속의 찌꺼기까지 날려 보낼것 같은 거세고 시원한

바람이 마음을 붙잡는다. 그래서 울릉도의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 울릉도엔 돌과 물과 향나무와

바람과 미인이 많단다.그리고 뱀이 없고 도둑이 없고 공해가 없는 오다삼무(五多三無)의 섬이

울릉도다.기암절벽을 파닥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두 마리의 갈매기가 정겹다. 파도 타는 아이

들이 흥겨워 보인다.좁고 꾸불꾸불한 길이 소박하다. 밤새 만선을 준비한 오징어 배를 기다리며

일출을 맞이하는 아주머니들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감돈다. “얼마나 더웠습니까?”인사하며

더위를 식혀 주는 파란 바닷물,초록이었다가도 어느새 검푸르게 변하는 청옥빛이 신비롭다.

까만 구릿빛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며 맑게 웃는 소년의 가슴이 커 보인다. 그 뒤를 종종 따라가며

재잘대는 소녀의 눈빛엔 순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 사는 맛이 진솔하게 나는 호박엿의 섬이었다. 울릉도는 그렇게 9월을 맞는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이었다.윗녘이 갑자기 수선스러웠다. 무서운 호열자(콜레라)가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호열자가 마침내 이 갯밭에도 몰아닥쳤다. 어른이고 아이고 느닷없이 열이 치솟는가 하면 설사

 줄줄 해대면서 죽어 넘어졌다.관가에서 포졸들이 나왔다. 성한 사람들은 환자들을 남겨 두

다른 데로 피신하라고 고지했다. 함께 있다가몰사한다는 것이었다.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자식이 부모 곁을 떠나는 집도 생겼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쑥대머리 머슴만은 마을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막무가내로 환자들을 돌봐주었다.…

호열자 기세는 찬바람이 나자 한풀 꺾였다.…돌아온 마을 사람들은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개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쑥대머리 머슴을 찾았다. 그러나 쑥대머리 머슴의 초라한 방문을 열어본 사람

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쑥대머리 머슴이 머리칼을 풀어뜨린 채로 기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 길로 쑥대머리 머슴은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채봉 소설, 초승달과 밤배에서).


병은 물러나기 마련이다.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사회, 국가의 병이든. 시원한 바람에 더위가

물러나듯, 더러움도 깨끗함에 밀려난다. 악도 그렇다. 거짓도 진실 앞에 설 수가 없다.아픔도 씻긴다.

거기엔 의와 봉사와 사랑이 요구되고 때로는 몸을 던져야 할 희생이 따르기도 한다.

더위를  맞이하는 이 땅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많다. 울릉도 호박엿처럼, 

우리에겐 진짜 사람 맛을 내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9월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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