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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처음 사랑

by 은빛지붕 2024. 5. 19.

고요한 아침이다. 밖엔 눈이 내린다. 등이 따듯하여 지그시 눈을 감는데 덜썩 가슴에 무게가 실린다.

손 같지도 않은 손이 앙증스럽게 얼굴을 꼬집는다.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놀아달라고 꼬드긴다.

늦둥이 녀석이다. 내 목을 타고 넘더니 발길질을 해댄다. 뺨에 닿는 녀석의 발가락 다섯 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꼼지락대는 모양이다. 녀석의 유혹에 어찌 끌려가지 않을 수 있으랴. 품에 행복을

안고 도취 지경까지 가려는 참에 녀석의 어미가 방해를 한다. 양말을 신겨 주란다. 녀석의 발을 잡고

양말을 손에 드는데 돌연 어머니 생각이 난다.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시골 동네 우리 집은 가난했다. 형들이 입던 옷을 대대로 물려 입었다. 특히 양말은 네 것 내 것

없었고 모두가 덕지덕지 기운 거였다. 그날도 밤새 눈이 왔고 일찌감치 집을 나서서 동구 밖 얼음판

으로 내달렸다.논에 물을 대서 만든 자연 썰매장, 얼음 위의 눈을 가르며 달리는 아이에게 시간 개념

있을 리 없다. 배가 고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지경이라야 집 생각이 난다. 어찌 된 일인가.

양말뿐 아니라 내복 겸 바지, 윗도리까지 온통 젖어있지 않은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는다. 쪼그리고 앉아 기우는 햇볕에 몸을 맡기다 졸기 시작한다. 얼떨결에 잠에서 깨니 어머니 발

림자, 후다닥 내달린다. 잡혔다간 야단이다. 끝내 뒷덜미를 붙들려 집으로….얼마나 두려웠던가.

무슨 말로 핑계를 댈 것인가. ‘친구가 밀어서 얼음이 깨진 물에 빠졌다.’‘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온 동네

들이 모두 그렇다.’이리저리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집 안으로 끌려 왔고 꼼짝없이 야단이

나야 했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가, 왠지 아무 말 없는 어머니가 더 무서웠다. 묵묵히 가마솥에 데운

물을 퍼다 진흙 발을 씻긴 후 나를 방 안으로 디밀어 놓고 총총총 사라지신다. 꿈인가 생시인가 눈을

크게 뜨고 아랫목을 살피니 곱게 접힌 내복과 새 양말, 신문지에 덮인 흰죽과 김치, 

“엄니이!”내가 느낀 처음 사랑이었다.눈물이 나고 감동을 감출 수가 없다.

 

설레고 떨리고 환희를 주체하지 못한다. 첫 우정도, 첫 사랑도 그렇다. 아내와의 첫 만남, 첫 여행,

첫 이야기, 얼마나 순수하고 진지하며 열렬했던가. 처음 사랑이다. 첫 월급을 손에 쥐고 감격에 겨워

다짐하던 각오가 얼마나 새로웠던가. 첫 아기를 안고 하루 종일 서성여도 피곤한 줄 모르던 혈기

팽팽한 애정, 처음 사랑이다.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처음 알았을 때,

온과 평정의 속 물결을 들끓여 터질 것 같은 감격으로 치닫는 뜨거움,처음 사랑이었다.

성경 요한계시록 2장 4절에“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견책이

나온다. 새해를 맞고 있는 지금 나의 심각한 문제다. 무구한 처음 사랑이 없다.

가식이 없는 사랑이었다. 용서와 회심의 사랑이었다. 사랑을 가슴에 안은 사랑이었다. 진리에 뿌리

내린 뜨거운 사랑이었다. 진실하고 무망하고 원칙적이며 넓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생각했다.

내 속보다는 남의 속을 먼저 헤아렸다. 그런 사랑, 처음 사랑이었다.사랑은 오래 참는다.

마음이 넓다.사랑은 친절하다. 선하고 성실하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무분별하지 않다.

랑은 자랑하지 않는다.자기를 낮춘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다. 제멋대로가 아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다. 기준이 있다.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는다. 이기적이지 않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 편안하게 한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는다. 복수심이 없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옳다. 사랑은 진리를 보고 기뻐한다.실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 덮어서 안전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받아 주고 감사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 희망으로 기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장애물을 넘는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른다. 결코 끝나지 않는다.  

나의 처음 사랑, 그 사랑으로 새해를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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