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렵다, 어렵다.”고들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7, 8월 공항은 언제나 성수기다.
그녀도 해외에서 보내는 꿈 같은 휴가를 그리며 공항에 도착했다. 무척 들떠서였을까? 도로가 막힐지도 모른다며 선잠을 자고 지나치게 서둘러 나온 바람에 일행과 만날 시간이 무려 두 시간이나 남아 버렸다. 공항 1층부터 3층까지 구석구석 사람 구경 삼아 느긋하게 몇 바퀴를 돌다 보니, 공항에 식수대가 몇 곳, 어디에 있는 것까지 다 외울 지경이 됐지만 아직도 1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해변 파라솔 아래서 열대 과일 주스를 마시며 폼 나게 읽을 책을 두어 권 챙겨 오긴 했지만 폼잡기용 책이었던 탓에 평소 독서 취향과는 무관하게 고른 책들이 지금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결국, 스낵 코너에서 평소 같으면 절대 사지 않을 값비싼 쿠키 한 봉지와 음료수를 사 들고 로비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거스름돈은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하고 꼼꼼히 영수증까지 챙긴 그녀는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쿠키 봉지를 열어 먹기 시작했다. ‘흠~ 비싸긴 하지만 역시 수제 쿠키라 그런지 맛은 좋네.’라며 내심 돈 아깝다는 생각을 슬쩍 밀어내려던 순간, 그녀보다 먼저 앉아 있던 옆자리 남자의 행태에 경악을 하고 말았다.아무리 먹고 싶어도 그렇지,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하나 먹어봐도 되겠냐는 양해도 없이 큰맘 먹고 산 그녀의 쿠키를 꺼내 먹는 것이었다.당황과 황당을 동시에 느끼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자 이 남자, 그녀를 보며 씽긋 웃기까지 한다. ‘무슨 저런 철면피가 있어?
친구들에게 꼭 얘기해 줘야지.’ 하고 가까스로 마음을 누르며 남은 쿠키를 빛의 속도로 먹어 치웠다. 원래 몇 개 들지도 않았던 터라 금방 다 먹어버리고 마지막 남은 한 개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 이 남자! 마지막 쿠키를 집더니 반을 뚝 잘라 그녀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오, 마이!’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는 거라며 갖은 경멸과 환멸을 담아 그 남자에게 썩소(썩은 미소의 준말) 를 날려 주고, 일행을 발견한 그녀는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지루한 출국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한 그녀는 바리바리 챙겨 온 바캉스 용품 때문에 미쳐 항공편으로 부치지 못한 짐들을 기내에까지 들고 타야 했고, 불룩해진 가방을 도저히 좌석 아래 둘 수가 없어 승무원의 눈치를 살피며 짐칸에 올리려는 찰라, ‘툭’ 하고 짐칸 선반 아래 앉은 외국인 탑승객의 정수리에 정통으로 떨어진 것은…그렇다! 한 시간 전, 처음 느껴 보는 고급스러운 식감 덕에 간신히 분노를 삭이며 먹어 치웠던 바로 그 문제의 수제 쿠키였다. 예쁜 리본으로 묶여있는 처음 모양 그대로였다.
단 몇 초 사이,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장대한 추리 영화 한 편이 지나갔다. 그 미스테리의 전말은 이랬다. 손에 음료수를 들고 거스름돈 확인하랴, 영수증 챙기랴 허둥대는 사이, 자신이 산 쿠키는 가방에 넣었다는 사실을 깜빡한 그녀가, 자신과 같은 쿠키를 가지고 있던 옆자리 남자의 쿠키를 먹은 것이었다. 퍼즐 조각이 맞춰진 순간, ‘멘탈 붕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남의 과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서 와삭거리며 먹는 이상한 여자를, 심지어 중간중간 째려보더니 나중엔 썩소를 날리고 가 버린 정말 이상한 여자를, 그저 씽긋 웃음으로 게다가 마지막 조각은 반을 나눠 주던 그 남자. 그가 어느 비행기를 타고 어느 도시로 날아갔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런 사람을 직장 상사로 둔 이들은, 그를 친구로 둔 이들은, 그를 같은 교회의 교우로 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복날 무더위도 씽긋 웃음으로 넘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역시 폼으로 가져 왔던 다이어리를 꺼내 또박 또박 쓰던 그녀는 밤잠을 설친 탓에 좌석 벨트 사인이 채 꺼지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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