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콜록.”
기침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마루로 나가 보았다. 남편은 소파에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늦게 들어온 날이면 남편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회사 사정이 더 나빠진 것은 알겠지만 그 늦은 시간까지 무얼 하는지, 그녀는 이래저래
남편이 못마땅했다.“회사 사정이 나쁠수록 더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휘청거리는 남자한테 누가 일을 맡기겠어?” 그녀가 남편에게 가장 많이 했던 잔소리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소귀에 경 읽기도 하루 이틀이었다.
두 아이 등록금, 학원비, 밀린 관리비…. 해결해야 할 돈이 태산인데,
남편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예 관심도 없는 사람 같았다. “내가 은행이라도 털어야겠어?
없는 돈을 어쩌란 말이야!” 어쩌다 돈 이야기를 꺼내면 남편은 화부터 낸다.
그리고 그런 날 밤이면 귀가가 더 늦었다. 그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누워 버렸다.
잠깐 누웠는데 깜박 잠이 들었던가 보다. 남편은 벌써 집을 나가고 없었다.
대신 식탁 위에 오만 원이 놓여 있다. 그녀는 어제 날아온 가스 공급 중단 통지서를 식탁에 올려
놓았다. 남편더러 똑똑히 보라는 뜻이었다. “이 돈으로 3개월이나 밀린 가스비를 어떻게 내란
말이야?” 고작 오만 원이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그녀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남편을 찾아가 단단히 따질 작정이었다.
그때, 그녀는 기침을 심하게 하던 남편 모습이 떠올랐다. “흥, 감기 들어도 병원 갈 생각도 못할
위인이지.” 그녀는 압력솥에 생강, 모과, 대추, 파뿌리, 배 등을 넣고 오랫동안 푹 고았다.
그리고 보온병에 가득 담았다. “집에 들어와 먹을 시간도 없으니 이렇게라도 가져다줘야 먹겠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집을 나섰다. 건물 맨 꼭대기에 있는 남편 사무실은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예전에는 직원이 여럿 있었는데, 책상마다 사람 앉은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실내에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난로를 살펴보았다.
“맙소사!” 가스가 끊겨 있었다. 난로 위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자신은 아무것도몰랐는지,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는지,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아내인 자신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지….
그러나 듣지 않았어도 그동안 진행되어 온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있었다.
재작년 남편은 많은 손해를 보았다. 물건을 납품하고 받은 어음이 부도 처리되었고,
그 돈은 영영 받을 길이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직원 봉급이 제대로 나갈 수 없었을 것이고,
회사도 이 지경이 됐을 것이다.
냄비 바닥의 라면 찌꺼기를 보는 순간 무거운 바위 하나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아프고 무거웠다.
“겨우 라면 쪼가리로 배 채우고 견디면서도 집에 들어오기가 그렇게 싫었어?”
그녀는 남편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따져 물었다. 눈물이 절로 나왔다.
“왜온거야?” 남편이 문 앞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보온병을 집어 들었다. “당신 감기 잔뜩 들었던데, 집에 일찍 오질 않으니 먹일 방법이 없잖아.”
그녀는 집에서 달여 온 차를 컵에 가득 채워 남편 앞에 내밀었다.
“당신은 감기 들어도 병원 약 잘 안 듣잖아. 파뿌리 달여서 마시면 금방 낫지만.”
“….” 남편은 잔을 잡았다. 그리고 한동안 잔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온병에 많이 있으니까 먹기 싫어도 후후 불어서 마셔요.”
그녀는 차마 남편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문을 나섰다.
“여보?” 남편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편을 보았다.
“이거 당신이 나한테 지어 주는 감기약이네. 이거 마시면 감기 금방 나을거야.”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얼굴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뒤돌아서서 목에 두르고 있던 털목도리를 벗어 남편 목에 감아 주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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