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스마트폰을 통해 친구나 지인들이 보내오는 좋은 글들을 자주 대한다. 어디서 찾아내었는지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때로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도 있다. 그런데 세상살이와 관련된 글들이란 대개 무한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성공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현실적인 처세술이다.사실 성공적인 삶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적 욕구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부나 명예, 권력이야말로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입시지옥을 거쳐서, 취직난을 뚫고, 경쟁하며 노력한다. 이런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러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인생이 아름다우려면 쓸데없는 생각은 버려라>는 어떤 책의 제목처럼,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이 어디 쓸데없는 생각뿐이겠는가? 이렇듯 쓸데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에 늘 노출되어 살면서 우리는 어느덧 실용주의적 정신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실용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개인적 성취와 자아실현 혹은 성공적인 인생을 위하여 단지 효율성만을 추구하며 쓸데없는 일들은 던져 버린다. 오직 큰일과 괄목할 만한 일, 중요한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에서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쓸데없는 사람은 멀리하고 쓸모 있는 사람은 가까이한다.
■ 작은 일과 작은 자
그러나 성경의 권고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 중에 눈길이 가는 두 말씀이 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태복음 25장 21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 40절).
두 말씀의 핵심은 “작은”이라는 단어이다. 그분은 작은 일을 중요하게, 작은 자를 귀하게 여기신다. 작은 일이란 쓸데없어 보이거나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일, 또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다. 작은 자란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사람, 지나쳐도 되는 사람이고 안 가 보아도 되는 사람이다.
언젠가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헛되이 죽어야겠다.”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이 짤막한 글귀는 오랫동안 내게 깊은 상념의 골짜기를 걷게 했다.성경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만난 사람들을 살펴본 적이 있다. 니고데모나 백부장 같이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그분이 친히 먼저 찾아가 만난 사람들 말이다. 사마리아 여인, 베데스다의 병자, 회당의 사귀 들린 사람, 문둥병자, 지붕에서 내려온 중풍병자, 손 마른 사람, 두 소경,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 나인성 과부,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 거라사의 귀신 들린 두 사람, 혈루증 앓던 여인, 야이로의 딸, 열 문둥병자, 소경 바디매오, 삭개오 등 하나같이 쓸데없어 보이는, 우리네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패래아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행하신 그분의 일 역시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는 정말 쓸데없어 보이는 일들이다.
■ 진정한 사랑의 동기
예수야 말로 자신의 말씀처럼 작은 일, 작은 자에게 집중하신 분이다. 이런 삶을 통하여 예수는 자신의 종교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진정 무엇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지 몸소 나타내 주셨다. 작은 일, 작은 자에게 집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그 동기를 설명할 수 없다. 진정한 애정과 관심이 아니면, 실용주의적 정신을 벗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가치에 눈뜨지 않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이다.사랑이 아니라면 그분의 죽음도 헛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을 위해 죽은지도 모르고 전혀 고마워하지도 않는 죄인들을 위해 죽었으니 말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이란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헛되이 죽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런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후에 인권운동가가 된 엘리 위젤(Elie Wiesel)은 ‘Zalman, or the Madness of God’이라는 희곡에서 하나님은 미친 짓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고 이야기한다.
"오늘날 하나님을 바로 믿고,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정한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미치십시오! 랍비여, 미치십시오. …오늘밤에 미친 자가 됩시다. 두려움을 발밑으로 던져 버립시다.”오랫동안 실용주의라는 지붕 밑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미친 짓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경쟁과 공정한 보수와 성과에 대한 대가(인센티브) 같은 것들이 정당한 가치로 자리매김해 왔다. 희생이나 봉사, 섬김이나 나눔 같은 가치들은 쓸데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여전히 경쟁 대신 희생하고, 보수 대신 봉사하는 일은 미친 짓이다. 남을 지배하기보다 섬기며 독점하기보다 나누는 것은 미친 짓이다. 침묵이 생존을 위해 더 나은 길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불의에 대항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내 승진과 업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지극히 작은 자의 필요를 돌보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러나 이 미친 짓, 사랑의 수고는 결코 쓸데없는 일일 수 없다. 지금은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헛되이 죽어야겠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런 미친 분들이 정말 그리워지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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